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킴 올라주원 (문단 편집) ==== 귀인 루디-T와의 만남, 2개의 반지, 내리막 ==== 1992년에 감독 대행을 맡았던 [[루디 톰자노비치]]가 정식으로 휴스턴 로키츠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루디는 올라주원의 활용도를 더 끌어올리는 방법을 구상했다. 올라주원의 넓은 시야와 패싱능력을 더욱 극대화시켜서 외곽슈터들을 활용하는 것. 올라주원이 1992-93 시즌에 공을 팀원에게 돌리며 3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하기 시작하니 본인의 득점도 더 쉬워져서 평균득점도 상승했다. 팀 역시 55승으로 새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2라운드에서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만나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100-103으로 석패. 1993-94 시즌에는 드디어 노력의 결과로 MVP를 차지했고,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피닉스 선즈]], [[유타 재즈]]를 차례로 꺾으며 [[1994 NBA 파이널|NBA 파이널]]에 올라가게 된다. 상대는 과거 대학시절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뉴욕 닉스]]였다. 뉴욕은 평균 91.5실점밖에 하지 않았던 당대 최고의 수비팀이었고, 유잉뿐만 아니라 [[찰스 오클리]], [[앤서니 메이슨]], 찰스 스미스 등 터프가이들이 모두 올라주원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이 공격에서 죽을 쓰고 있는동안 올라주원은 매 경기 20득점 이상을 쌓아주었고, 6차전에서 이날 27득점을 퍼부으며 휴스턴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존 스탁스의 마지막 슛을 막아내며 휴스턴의 승리를 지켰으며 7차전에서도 25득점에 성공하면서 첫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당연히 파이널 MVP는 올라주원에게 돌아갔다. 1994-95 시즌은 위기였다. 올라주원을 필두로 많은 휴스턴 선수들이 부상을 당했기 때문. 선수수급이 안되어서 CBA선수까지 데려다 쓸 정도였다. 결국 휴스턴은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데려오는 강수를 뒀다. PHI SLAMA JAMA 콤비가 다시 재건된 것. 그러나 드렉슬러를 영입한 후에도 팀 성적에는 그다지 나아짐이 없었고, 직전시즌 우승에 공헌했던 준수한 주전 슈팅가드 [[버논 맥스웰]][* 준수한 외곽 슈팅과 엄청난 폭발력 및 기복을 가진 슈팅가드였다. 수비도 잘하고 팀 내 어시스트 리더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패싱능력도 있었다.] 자신을 두고도 드렉슬러를 새로 영입한 구단에게 불만을 내보이는 등 팀은 계속해서 휘청거렸다. 그렇게 휴스턴은 서부전체 6위라는 다소 낮은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삐걱대던 와중에 상기한 맥스웰이 플옵에서 사실상 이탈해버린 것. 1라운드에서 유타에게 3-2로 힘겹게 승리한 휴스턴은 세미파이널에서 [[찰스 바클리]]와 케빈 존슨의 피닉스 선즈와 재회, 4차전까지 1-3으로 털리며 끝장나는 듯 했으나 기적적으로 내리 3경기를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MVP였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만났다. 서부 결승에서 휴스턴은 접전 끝에 샌안토니오를 4-2로 눌렀는데, 올라주원은 데이비드 로빈슨을 상대로 우위를 보이며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로빈슨을 상대로 선보인 드림 쉐이크는 올라주원을 상징하는 하이라이트가 되었고, 요새도 틈만나면 해당 장면을 틀어줘 스퍼스팬들을 두 번 죽인다. 한편, 당시 스퍼스와 불화를 일으키고 있던 [[데니스 로드먼]]은 플옵 탈락 후 로빈슨은 리더의 자격이 없다며 맹비난을 했고, 결국 다음 시즌 때 시카고로 이적한다.] [[1995 NBA 파이널|결승전]] 상대는 젊은 패기의 [[올랜도 매직]]. [[샤킬 오닐]]과 [[앤퍼니 하더웨이]] 콤비가 버티고 있는 동부의 신흥 강호였다. 특히 이들은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복귀한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꺾는등 상승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전문가들도 휴스턴 보다는 젊은 올랜도 매직의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휴스턴은 그런 전망을 철저히 비웃으며 4전전승으로 올랜도를 스윕하고 2번째 우승을 차지한다. 올라주원은 4경기 평균 32.8득점 11.5리바운드라는 미친 기록을 찍고 다시 파이널 MVP를 먹었다.[* 당시 휴스턴과 올랜도는 팀 구성이 썩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각각 하킴-샤크라는 최고의 센터와 이를 받쳐주는 드렉슬러-페니라는 All-NBA Team 급 가드를 보유했고, 센터의 그래비티를 활용하기 위해 케니와 호리, 앤더슨과 스콧 등 준수한 3점 슈터들이 잘 배치된 것도 비슷했다.] 이 시점에서 올라주원은 두말할 것 없이 마이클 조던이 없는 NBA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드렉슬러도 예전만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사실상 단신으로 유잉, 로빈슨, 바클리, 칼 말론, 샤킬 오닐을 털어버리며 리핏을 차지했다. 심지어 바클리와 말론은 두 번 이겼다. 저 다섯이 보통 1990년대 최고의 빅맨 2~6위를 차지함을 생각하면 올라주원이 얼마나 위대한 2년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1995-96 시즌에 시카고 불스가 조던-피펜-로드먼을 앞세운 빅3로 정규 시즌 최다승과 NBA 우승을 거머쥐자 휴스턴도 전력보강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찰스 바클리가 눈에 들어오게 되고, 휴스턴은 기존의 올라주원과 드렉슬러에 바클리로 이어지는 빅3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바클리를 영입하면서 팀의 주죽선수를 너무 많이 내어주었다. 특히나 [[로버트 오리]]와 [[샘 카셀]], [[케니 스미스]]의 이탈은 팀의 로스터를 얇게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1996-97 시즌에 바클리와의 포스트업을 이용한 표준적인 '세트 오펜스'와 단신 수비진들의 교란전술 '트랩 앤 로테이션' 등을 선보이며 57승 25패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천적이었던 시애틀도 물리쳤지만[* 올라주원 데뷔 이후 1997년 전까지 플레이오프에서 시애틀과 4번 만났는데 모두 졌다.]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유타에게 패해 파이널 진출에 실패한다. 이후 올라주원은 헤르니아 탈장을 비롯한 각종부상에 시달리면서 기량이 많이 하락하게 된다. 출전시간도 줄어들었다. 팀도 서서히 팀의 중심을 스티브 프랜시스와 커티노 모블리에게로 가져가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주원의 입지도 줄어들었다. 2000-01 시즌이 끝난 후, 휴스턴은 올라주원에게 3년간 1,300만달러의 계약을 제시했다. 이미 예전의 기량은 기대도 하지 않고, 곧 마흔을 바라보는 노장선수에게는 상당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휴스턴 로키츠를 두번이나 우승시키고 강팀으로 만들어준 프렌차이즈 스타에 대한 그들의 최대한 예우였다. 하지만 올라주원의 에이전트 댄 패건[* [[길버트 아레나스]]와 제이슨 리차드슨, [[숀 매리언]], 트로이 머피, 드와이트 하워드, 존 월, 드마커스 커즌스 등이 그의 손을 거쳤으며, 2016년 《포브스》로부터 탑 에이전트 리스트에 선정된 관록의 에이전트다. 반면 NBA 팬들 사이에서는 계약 종결자라 불릴 정도로 악명이 자자한 에이전트로, 협상 질질 끌고 꼬장부리기가 특기이며 201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이 "저런 계약조건은 우리 고객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휴스턴과의 협상을 중단해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올라주원은 토론토 랩터스와 3년간 1650만달러에 계약했다. 이를 두고 댄 패건은 올라주원이 자신에게 직접 휴스턴과 협상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했지만 팬들 대부분은 이 인간의 말을 안 믿었다. 지금도 몇몇 팬들은 댄 패건을 "돈에 미쳐서 역사상 위대한 센터의 말년을 초라하게 만든 놈"이라고 까대고 있다. [[파일:external/media.tumblr.com/tumblr_m0kw5vBawq1qeaqak.jpg]] 당시 벌어졌던 라이벌리 한 컷.[* 이 당시 라이벌이었던 [[패트릭 유잉]]은 [[뉴욕 닉스]]의 GM 스캇 레이든에게 팽당하는 바람에 십수년을 뛰어온 뉴욕을 등지고 시애틀과 올랜도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올라주원이야 그나마 휴스턴이 계약 제시라도 했지, 유잉은 유잉이 트레이드된 건 유잉 본인의 선택이었다. 당시 유잉은 "유잉무용론"에 지쳐서 "나 필요없으면 간다"는 심정으로 트레이드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뉴욕 닉스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했어야 했다고 이 선택을 후회했다고 한다. ([[https://www.foxsports.com/nba/story/patrick-ewing-new-york-knicks-trade-033016|당시 자료]]) 또한 계약이 끝나고 적절한 액수로 재계약할 수 있었던 올라주원과 달리 유잉은 트레이드될 당시 1년/1천400만불이란, 당시 기준으론 어마어마한 액수가 남아있었다는 점도 다르다.] 결국 올라주원은 [[토론토 랩터스]]에서 계약기간도 다 못채우고 1년 뛰고 바로 은퇴했다. 은퇴후에는 [[요르단]]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이슬람 공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틈나는대로 미국으로 돌아가서 후배 빅맨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자신의 모국팀인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개인교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패트릭 유잉]]과는 달리 지도자가 되기위해서 표면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 듯.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NBA 모든 팀 선수들이 앞다투어 그를 찾아오는데 이는 아래 서술. 2008년 9월 6일에는 유잉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